지난 3편에서 우리는 설탕법과 인지세법을 둘러싼 갈등과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식민지 주민들의 저항 정신을 살펴보았다. 영국의 강압적인 세금 정책에 부딪혀 인지세법은 철회되었지만, 양측의 감정의 골은 이미 메우기 힘들 정도로 깊어진 상태였다. 영국 본국은 식민지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식민지 주민들은 부당한 간섭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팽팽한 긴장감은 결국 북아메리카 전역을 피비린내 나는 폭풍 속으로 밀어 넣는 두 가지 결정적인 사건으로 폭발했다. 오늘은 그 역사의 분수령인 보스턴 학살과 보스턴 차 사건의 전말을 파헤쳐 보려고 한다.
갈등의 중심지는 단연 보스턴이었다. 당시 보스턴은 식민지 저항 운동의 심장부였으며, 영국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치안이 불안해지자 영국 본국은 질서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정규군 병력을 보스턴 시내에 주둔시켰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외국 군대가 자기 도시를 점령한 것과 다름없었기에 두 세력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사건은 1770년 3월 5일 밤에 터졌다. 눈보라가 치던 추운 날씨 속에서 보스턴의 세관 건물 앞에 주둔하던 영국군 초병에게 젊은이들이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눈뭉치에 돌을 섞어 던지고 욕설을 퍼붓자, 군중이 삽시간에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겁을 먹은 영국군 병사들이 흥분했고, 지휘관의 명확한 발포 명령이 있었는지는 아직도 역사적 논란이지만, 결국 총성이 울렸다. 이 총격으로 현장에서 식민지 주민 3명이 즉사하고 2명이 부상 끝에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식민지 언론과 정치 지도자들은 이 사건을 즉각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이라 부르며 대중의 분노를 극도로 끌어올렸다.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향해 영국군이 총을 쏘았다는 사실은 식민지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 이후 몇 년간 잠시 소강상태가 찾아오기도 했다. 영국이 차(Tea)를 제외한 대부분의 품목에 대한 세금을 일시적으로 거두어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773년, 영국은 경영난에 빠진 동인도회사에 차의 독점 판매권을 주는 '차법(Tea Act)'을 통과시켰다. 표면적으로는 차 가격이 저렴해진 것처럼 보였지만, 식민지 상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치였고 무엇보다 영국의 일방적인 과세권 행사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선언이었다. 이에 격분한 식민지 저항 조직인 '자유의 아들들' 소속 회원들이 원주민(모호크족)으로 변장하고 보스턴 항구에 정박해 있던 동인도회사의 선박에 몰래 잠입했다. 이들은 배에 실려 있던 수백 상자의 차를 바다로 통째로 던져버렸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다.
차 수십만 파운드가 바다에 수장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 국왕 조지 3세와 의회는 대노했다. "더 이상 자비란 없다"며 보스턴 항구를 봉쇄하고 자치권을 박탈하는 무자비한 보복 조치를 내렸다. 갈등은 이제 말이나 시위의 단계를 넘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누군가와의 갈등을 해결할 때, 대화가 끊기고 감정적 대응이 오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18세기 영국과 식민지의 관계 역시 소통의 부재와 오만함이 겹치면서 파국을 향해 달렸고, 보스턴 학살과 차 사건은 그 멈출 수 없는 기차가 되어 역사의 궤도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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